July, 2017

가이드포스트 클래식

사이판의 선물



조민희(영화감독)

   1988년 처녀작 <외인구단 II>로 데뷔한 후, 나는 모든 외부 활동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공백 기간이 영화 제작 준비나 작품 구상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6년간의 조감독 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더욱 깊이 영화에 대해 연구하고 구상하는 여유를 가졌을 뿐이다.

   나는 조감독 시절부터 영화는 사랑의 실천을 북돋우는 강장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이 시대에 영화가 담당해야 할 사명이라니, 진부하고 케케묵은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랑, 진실을 추구하는 삶만이 가장 가치 있는 삶임을 영화가 보여 줘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가식적이었는지를 일깨워 준 사건이 늦가을 저녁,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되었다.

   10월의 어느 날, 기우는 저녁 햇살이 창문으로 비쳐 들어 내 앞에 있는 탁자를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연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다음번 작품의 시나리오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좀 더 신선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의 요란한 소리가 온 거실에 울려 퍼졌고 곧이어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빠요?”

   “아뇨, 좀 쉬려는 참이었어요.”

   나는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커피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좋은 구경하러 갑시다. 장소는….”

   그는 재빠르게 장소를 알려 주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밖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그가 일러준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나와 직접적인 교제는 없었지만 네댓 명의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잘 나오셨어요.”

   그들은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지 악수를 청하거나 인사말을 건넸다. 10분가량이 지나자 모두들 작은 창고 같은 곳에 한 명, 두 명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바로 교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른바 신앙을 가진 연예인들의 순회 공연에 관람객으로 초청 받은 게 틀림없었다. ‘아, 두어 시간 동안 졸게 생겼군!’ 나는 그들이 지정해 준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깊은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쯤 지났을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고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몸을 일으켜 선배가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선배는 턱으로 얼른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랑의 하모니’ 팀의 마지막 분을 소개합니다. 조민희 감독….”

   나는 엉겁결에 일어나서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사실 이런 단체에 대해 평소 그리 좋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1년에 손꼽을 정도로 교회에 나가는 나로서는 이런 단체에 속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튼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사랑의 하모니’ 팀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그 팀으로부터 사이판, 괌으로 선교 여행을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흔쾌히 하겠노라고 했다. 물론 선교에 대한 열망보다는 ‘매혹적인 태평양의 파라다이스’로 가볍게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는 심사였다. 또 진척되지 않는 영화 구상에 이번 여행이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지만 막상 괌에 도착해 “Welcome to Guam”이라는 플래카드를 든 우리 동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게 되자 내가 이곳에 온 원래의 목적, 즉 ‘선교 여행’이라는 사실이 새삼 부담감으로 성큼 달려들었다.

   괌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곳저곳 돌아볼 겨를도 없이 우리 팀은 두 차례의 공연을 마치고 빡빡한 일정에 따라 다음 예정지인 사이판으로 옮겨 갔다.

   사이판에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 3000여 명이 봉재공장과 전자제품 공장 등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를 맞는 그들의 표정은 나로 하여금 공연한 흥분에 휩싸이게 했다. 굳이 입술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뜨거운 동포애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공연 마지막 날이 성큼 다가왔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팀에 끼여서 적당히 지내 왔지만 공연 피날레로 장식할 성극의 성공 여부는 연출자인 나에게 달려 있었다. 겨우 열흘 남짓 연습해 온 것이니만큼 내용 전달에도 자신이 없었고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해 낼지도 자못 미심쩍었다.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었다. 기도와 노래, 율동이 이어졌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연극 순서를 기다리며 내 앞에 앉아 있는 20세 안팎의 젊은 아가씨들을 연민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고국에서 와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격해했다. 우리 팀의 작은 몸짓에서 표정 하나하나까지, 그들은 어떤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그 맑은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고향의 냄새를 눈으로 맡겠다는 듯이.

   사이판에 어둠이 내리고, 공연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나는 문득 그들의 얼굴에서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을 보았다. 한창 젊음을 만끽하며 인생을 배울 나이에 이국만리 태평양의 섬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평온해 보였고 사랑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일까?

   나 역시 이들과 환경이나 시기는 달랐지만 영화계에 들어서기 전, 부친이 물려주신 나염공장과 목장을 운영하며 내 삶의 확실한 터전을 찾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좌절도 했고 방황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내게 씁쓸한 사회의 단면들, 그리고 삶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을 뿐이다.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도 이런 갈등이나 좌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나는 똑같은 인생의 여정을 밟고 있는 친구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물밀듯이 내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동안 연극을 무대에 올릴 차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그들과 나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지금껏 고생하고 방황했던 것은 오로지 내 자신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였다. 가치 있는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 뒤에는 자기만족과 탐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자족할 줄 알고, 개인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고국의 누군가를 위해 그들은 고통과 싸우며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을 향한 나의 연민은 존경심으로 바뀌어 갔다.

   마침내 연극이 시작되었고, 그들의 환호와 탄성 속에서 공연은 막을 내렸다. 부랴부랴 준비해 온 연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은 정말 진지했고 만족스러워했다.

   “정말 좋았어요, 다음 해에 또 오실 거죠?”

   “저희들을 위해서 이토록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저기서 인사말이 들려왔다. 그중 유독 눈이 크고 앳돼 보이는 소녀 한 명이 내게 다가와서는 무언가를 건네주며 수줍은 듯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실은요, 아버지께 선물하려고 사 둔 것인데요. 이곳까지 오신 데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거예요.”

   나는 빨간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싼 그 선물을 받아 들고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의미로 악수를 청했다.

   “고마워요….”

   그녀의 손은 거칠고 딱딱했다. 사랑과 헌신, 인내의 아름다운 삶이 거기 새겨져 있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이사야 65:17-18).

   나도 모르게 언젠가 보아 두었던 성경 말씀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예기치 않던 깨달음과 감동이 가슴을 가득 메웠고 기쁨과 감사가 흘러나왔다.

   이튿날, 우리 팀은 그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플랫폼에 들어섰다. 그때 어제 저녁 유독 눈이 크고 앳돼 보이던 그 소녀의 얼굴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줄곧 사이판의 여성 근로자들과 그 소녀를 떠올렸다. 나는 영화보다 가치 있고 감동적인 현실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나는 내 앞길에 무슨 일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 얼마나 많은 좌절과 갈등, 시행착오를 겪을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사이판의 그 소녀가 수줍게 건네준 선물을 영화로 복제해 내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은 가이드포스트 1990년 4월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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